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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7월 04일
“삼년 안에 며느리를 들여야겠어.” 아버지가 말했다. 한가로운 평일 저녁. 불쑥. 식사를 하는 중에 아버지가 되뇌었다. 굳게, 다짐하듯. “삼년. 늦어도 사년 안에는 며느리를 들여야겠어.” “잠깐만요. 아버지 방금 뭐라고…?” 어안이 벙벙해서 입을 열었다. 누구냐면, 물론 나. 동생은 입대로 집에 없으니 며느리를, 그러니까 부인을 맞을 대상인 아들은 나밖에 없었다. 아버지가 시아버지로 전직을 꿈꾸는 동안 난데없이 기혼자가 된 아들도 나고, 이게 무슨 소리인가 퍼뜩 놀란, 연애세포 따윈 진작 사멸된 한심한 아들도 나이긴 한데 화자로서의 내가 당황하든 말든 타자인 나의 장래계획을 그리던 아버지는 내 질문 따윈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듯 TV에 집중했다. 아, 제발 좀! 가족이 두런두런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의 평화는 한순간에 폭격 당했다.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내가 당신의 얼굴을 마주한 생애를 통틀어 가장 이글거리며 야망에 불타는 모습을! 번뜩이는 안광은 평온한 저녁을 삽시간에 버섯구름 피워 올리는 폐허로 뒤바꾼 폭탄이었고, 나는 얼빠진 채 어 저건 뭐지? 하며 섬광을 가리키다 삽시간에 통구이가 된 행인 1이었다. 황망한 채 어머니를 돌아봤다. 엄마 도와줘.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섰다. 동맹군이었다. “결혼은 뭐 아무나 한데? 직장이 있어야 할 거 아냐. 당신은 알지도 못하면서…” 어머니! 첩자셨습니까! 파란만장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결혼이라? 언젠가 들은 친구의 친구, 사돈의 팔촌 격인 타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동갑인데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여자 친구와 혼인신고를 올렸다는 이야기였다. 면식하나 없는 남의 사정이 떠오른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야기를 전해주던 그녀가 유난히 부러워하는 기색이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친구 앞으로 어떡할 거래?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덜컥 저질렀으니.” 이 말은 나였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정말 행복하지 않을까? 난 응원해주고 싶어. 넌 안 그래?” 이 말은 그녀였다. 그래. 나는 조금 내키지 않은 끄덕임으로 동의했다. 응원이야 해주고 싶지. 누군들 남의 혼사에 재 뿌리는 말하고 싶어서 하나. 걱정돼서 그렇지, 따위의 궁시랑은 속으로 삼켰다. 뭐 알아서들 헤쳐 나가겠지. 그런 생각으로 자리를 모면했다. 돌아보면 정말 부끄러운 기억이다. 타인의 사정을 함부로 재서는 안 되는데 모자란 내가 여전히 찧고 까부는 잘못을 한다. 불쑥.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저녁, 아버지의 말씀처럼 그렇게. 불쑥.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해요. 그때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었어. 후회는 언제나 늦어 뼈아프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내가 잘못했다. 불쑥. 자리에 앉아 텅 빈 공중을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정말.
2008년 06월 23일
사주팔자를 믿지 않는 나이지만 희한하게도 아비의 사주에는 항상 역마가 붙어있었다. 질기게도 달라붙는 역마에 이끌려서일까. 아비는 엿판을 지고 장터를 떠도는 대신 직장에서 직장으로 거듭 헤매기는 했었다. 이번 직장에서 한 달이면 다음 직장에선 석 달. 그런 식으로 이직에 이직을 거듭한 젊은 아비의 그림자는 빈곤한 가계로 신음하는 어미와 그런 부모 밑에서 불화 직전까지 가슴 졸인 두 아들을 가렸다.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당시에는 항상 이혼을 염두에 두었다. 부모가 결별하면 나는 누구에게 맡겨질까. 언젠가 동생에게 그런 말을 한 적 있다. 부모님이 갈라서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끔찍하게 다툰 어느 밤, 그 밤이 지나고 모진 결심으로 동생에게 말했다. 동생은 가만히 듣다가 고개만 주억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고나 있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동생은 아주 어리지만은 않았고 나도 그랬으니까. 불우한 가계는 불온한 가정으로 이어졌고 살얼음 같은 위태로움을 지나면서 형제는 강해졌다. 강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미칠 것 같았으니까. 인문,사회과학을 들추면서 배운 도시빈민이란 단어를, 우리는 뜻을 알기 전에 먼저 체감했다. 도시빈민. 언제 깨질지 모르는 도시빈민.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도시빈민. 우리는 도시빈민. 빌어먹을. 영화를 보면 주인공은 곧잘 반항도 방황도 한다는데 우습게도 나는 어느 놈팡이가 쓴 시나리오의 단역 배우인지 가출을 하지도 술 담배를 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렇게 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변변한 가정사에도 딱 한번 화를 낸 적이 있었다. 아비가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됐을 때였다. 외출해서 돌아오니 아비는 몸을 못 가누고 소파에서 바닥으로 반쯤 걸쳐 쓰러져있었다. 그걸 보자니 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더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무슨 소리를 하는 지도 몰랐다. 이성이란 것이 이리도 간단하게 휘발될 수 있음을, 그때 처음 알았다. 복장이 뒤집혀 묵은 것들을 꺼내보였다. 설움이란 것은 알알이 맺혀 진주가 될 수 없다. 단지 한으로 남을 뿐인 묵은 것들을 편린이나마 끄집어낸 다음날. 아비는 숙취에 구겨진 얼굴로 식탁을 찾았다. 나는 밥을 먹고 있었다. 집에는 나와 아비 단 둘뿐이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설움이란 것은 김치나 장과 달라 오래 두어도 발효되거나 맛이 좋아지지 않는다. 단지 지독해질 뿐이다. 그 지독함을 맛보았다.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래도 할 수 없다. 가출을 한다고 달라질 것이 없거니와 그랬다간 당장 집안이 결딴날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마저 엇나갔다간. 그런 위기의식이 항상 뒤따랐다. 동생에게 자랑일 수 없는 한심한 형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막나갈 수는 없었다. 사실은 동생이 무서웠다. 속내를 알 수없는 그.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모를 그. 내가 가출이랍시고 하루 외박을 하면 동생은 아예 나가버릴 것 같았다. 무서웠다. 공포가 나를 붙들었다. 나는 겉으로나마 평온을 가장했다. 필사적이었다. 자주 웃고, 자주 떠들었다. 그 덕에 지금까지 수다스럽다. 수치스럽다. 불화는 우리가 더 나이 들며 가라앉았다. 지금은 자주 웃고 자주 떠든다. 달라지지 않은 것과 달라진 것들 사이에서 나는 어느 덧 눈가에 주름이 생겼고 동생은 훌쩍, 입대를 해버렸다. 어제가 동생의 면회였다. 입대 전 대판 싸우고 다신 얼굴 안 본다며 본 척 않은 것은 나였다. 훈련소에 있을 동생에게 슬쩍 편지를 보내 화해를 청한 것도 나였다. 컬렉트콜로 건 짤막한 전화로 멋쩍은 안부야 간혹 나눴지만 얼굴을 보는 것도 이번이 두 번째. 참 오랜만이었다. 위병소에 면회신청을 하고 들어서자 그새 연락이 닿았는지 동생은 저만치서 우리를 기다렸다. 경례를 붙이고 달려오는 폼이 그때보다 말라 안쓰럽기만 했다. 정신없이 싸고 온 음식을 풀고 먹으며 말했다. 의병전역으로 군 생활이 길지도 않는 나는, 그 주제에 꼴불견이었다. 시간은 모르는 새 바삐 지나갔다. 차에 오르기 전 굳게 안은 동생은 단단했다. 그 모습이 고마워 지금은 돌아가신 할머니마냥, 마냥, 등을 뚜덕였다. 사랑한다, 동생아. 부디, 언제나 평화롭길.
2008년 06월 14일
시간강사가 돌아왔다. 먼지로 뒤덮인 중절모에 허름한 옷차림 그리고 채찍. 당신의 유년시절을 박진감 넘치게 만든 바로 그 고고학자가 돌아왔다. 늦은 밤 졸린 눈 비비고 앉아 뚫어지게 쳐다보던 주말의 영화. 그 영화 속 주인공이 돌아왔다. 소년의 모험을 대신하던 영웅의 귀환이다. ![]() 2008년은 꽤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하는 시기다. 전작과 원작에의 복고가 관객의 향수를 자극하는 계절. 마하고고는 스피드 레이서가 되어 현란한 디지털 색조로 스크린에 복귀했고 인크레더블 헐크는 이안 감독의 헐크와는 다른 혈육임을 주장하며 녹색 거구로 포효한다. 그 뒤를 이을 다크나이트는 또 어떤가. 이렇듯 개편과 속편의 물결은 청량한 피서의 대용으로 손색이 없을 정도다. 곤도르에 잃어버린 왕이 돌아오듯 우리가 일상에 매몰돼 잊어버린 추억 속 영웅들도 그렇게 하나 둘 속속 귀환하고 있다. 그리고 그 무리 중에 바로 인디아나 존스가 있다. 본명 헨리 월튼 존스 주니어. 기억할지는 모르지만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주니어가 싫어 애견이름을 자기 이름 삼은 희대의 반항아. 바로 그다. 영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사막에 외따로 떨어진 군 기지를 일단의 무리가 급습한다. 기민한 움직임으로 기지를 제압한 그들은 어느 창고에 서서 마침내 억류한 그를 끄집어낸다. 상징인 모자가 먼저 떨어지고 트렁크에 처박혀 겨우 숨만 몰아쉰 그가 그제야 모습을 드러낸다. 인디아나 존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온 그에서 비치는 것은 짙은 피로다. 세월이 잔인한 것은 한 인물의 영화를 고스란히 기억하게 한 채 곧 그것을 박탈하기 때문이다. 매끈한 얼굴로 시리즈마다 염문을 뿌리기 바빴던 그는 어디 가고 이제 주름진 얼굴로 옛날만 그리는 그가 있다. ‘예전에는 날아다녔는데.’ 왕년에 한가락 했던 고고학자의 노쇠는 탈출의 순간, 실패한 채찍 곡예로 드러난다. 육공트럭 차창을 엉덩이로 박살내며 그가 탄식한다. 믿었던 친구도 배신했다. 갈수록 몸은 굼뜨고 예전 같지 않은데 기껏 수가 트이려니 동료가 총구를 돌린다. 믿을 놈 하나 없다. 그러나 마지막 남길 말을 묻는 적의 빈정거림을 구겨진 얼굴로 한마디 되받아치는 순간, 그는 여전히 그임을 알게 된다. 지구에서 가장 섹시한 모험가. 입술이 두껍지도, 가슴이 크지 않아도 그는 여전하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 정말이지, 나는 이런 농담을 참을 수가 없다! 매카시즘의 광풍이 한창인 세계에서 총을 겨눈 공산당 무리에게 하는 말이라니! 멋진 활약은 이제 기대할 수 없지만 여전히 그는 구르고 뛴다. 시리즈를 충분히 학습한 팬이라면 기뻐할 소품도 제법. 1편 마지막 성궤를 보관한 기지가 바로 이곳임을 알아볼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이 미스터리에 목마른 마니아라 네바다 공군기지가 온갖 소문의 온상지임을 알고 있다면 또한 인디펜던스데이에 등장한 외계인 연구시설이 바로 이곳임을 안다면, 기뻐하라. 활극만이 전부가 아니다. 미스터리도 함께 당신의 카타르시스를 향해 진군할 것이다. 당신의 오감을 점령하고 나서 고지에 깃발 꽂듯 마침내 뇌리에 명령할 것이다. ‘이봐, 이런 멋진 영화를 보고 나면 어떡해야하지?’ 어떡하긴. 그저 감탄할 수밖에.
모든 문화예술이 현실의 반영임을 알고 있다면 신작, 인디아나 존스와 크리스털 해골의 왕국은 퍽 복잡한 그림자임이 틀림없다. 스필버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미지와의 조우와 E.T, 우주전쟁과 이번 신작을 놓고 보면 감독은 이제 그가 꿈꾸고 그를 이뤘던 낭만과 작별을 하려는 듯 보인다. 어린 남매의 친구였던 E.T는 이제 로스웰 외계인과 뒤섞인 모습으로 신작에 등장한다. 그리고 떠난다. 그 외에 하는 일이라곤 탐욕스런 인간을 불태우기 전 한번 눈살을 찌푸리는 일 뿐이다. 그리고는? 떠난다. 우주선 타고 멀리. 저 멀리. 환상이 떠났다. 남겨진 현실은 혹독하다. 인디아나 존스는 등장하자마자 원폭실험을 경험했고 아버지는 죽었다. 생면부지의 아들은 학업하나 마치지 못한 날건달인데다가 아빌 닮아 어찌나 폼을 좋아하는지 곧 죽어도 빗 없이는 못산다. 시리즈의 첫사랑은 간만의 재회인데 어찌 이리 늙었나. 그래도 좋다. 구질구질해도. 좌충우돌해도. 그게 사는 모습이다. 반백이 되 성혼해도, 그래도, 그는 여전히 중절모를 고수하며 씩, 미소 한번 지으며 유쾌하게 떠난다. 어쨌든 Life is gone. 이것이 돌아온 영웅이 가르치는 삶의 교훈이다. 모쪼록 당신도 유쾌하길. 추신. 반드시 극장에서 보길 바란다. 정글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넓은 화면으로 볼수록 몰입감이 더하다.
2008년 06월 12일
우리 집은 조선일보를 구독하는데 기사배치를 보면 퍽 흥미롭다. 전면에 시위사진을 걸어놓고 국민여론을 수렴하는 듯 전시하면서도 장을 넘기면 논평이나 기사보도를 통해 꼭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리는 것이다. 이 화법이 재미있어 그간 거들떠도 안 보던 조선일보를 시늉이나마 들춰보는 중인데 어쨌든 활자 인쇄물이니 읽는 맛은 쏠쏠하다. 요즘 내 생각도 좀 오락가락하니 뒤숭숭한데 신문마저 그런 꼴이라 이 기묘한 일치가 혼자 우습다. 광우병 재협상을 연호하지만 실상 이미 끝난 협상을 어떻게 물릴 수 있을지. 나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다면 이 엎지른 물을 주워 담으라고 윽박지르기 보단 치우는 일이 급하지 않을까. 그것이 이 정권의 퇴진요구로 발현된다면 수긍할 수 있으나 지금처럼 무작정 고시철폐 재협상만을 주장한다면, 지금 이 열기가 얼마나 오래갈지. 솔직히 나는 자신할 수 없다. 하여간, 시위를 지켜보는 내 입장은 그렇다. 이번 토요일에 소위 그 명박장성을 구경하러 광화문에 나가볼 것이기는 하나 얼마간 발을 빼는 입장이랄까. 건축의 신기원을 이룩한 컨테이너 축성도 노무현 시절 이미 등장한 것이라니 아주 새롭지는 않겠지만, 가까운 거리에 해괴한 장벽이 생겼다는 데 안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사진으로만 보는 것과 직접 체감하는 것은 확실히 달라서 나는 피부로 느끼며 사고하고 싶다. 생각이 복잡한 요즘은 더욱 그렇다. 정말 역사는 거꾸로 흐르는 중일까. 대추리 때는 군부대가 출동했었는데도? 만약 지금 시대가 회귀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그건 아마도 그때부터 시작된 역류의 물결이 이제야 눈에 띄게 확연해진 것일 뿐임은 아닐까. 그런 생각에, 나는 지금도 노무현이 싫다. 이명박이 싫은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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